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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백한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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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백한 운명은 1845년 저널리스트 존 오설리번이 처음 사용한 용어로, 미국이 북미 대륙을 확장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는 믿음을 의미한다. 이 사상은 19세기 미국의 팽창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텍사스 합병, 오리건 영토 획득, 멕시코-미국 전쟁, 알래스카 매입 등 미국의 영토 확장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명백한 운명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강제 이주와 학살을 정당화하고, 미국 제국주의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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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백한 운명
지도
기본 정보
명칭명백한 운명 (Manifest Destiny)
의미미국의 팽창주의적 이념
배경
시기19세기 미국
주요 주장미국은 신이 부여한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있으며, 그 사명은 북미 대륙 전체를 지배하고 문명을 확산하는 것이다.
관련된 개념미국 예외주의
팽창주의
개척 정신
문명화 임무
역사적 맥락
기원1845년 존 오설리번이 처음 사용
서부 확장루이지애나 매입
미국-멕시코 전쟁
오리건 영토 획득 등
영향아메리카 원주민의 강제 이주 및 학살
멕시코 영토의 상당 부분 획득
팽창주의 정책 정당화
비판인종 차별적이고 제국주의적 이념이라는 비판
노예 제도 확산에 대한 책임
관련 인물
주요 옹호자제임스 K. 포크
존 오설리번
반대자에이브러햄 링컨
율리시스 S. 그랜트
문화적 표현
그림존 가스트의 "아메리카 진보" (American Progress)
문학다양한 문학 작품에서 팽창주의 정당화 및 묘사
정치적 담론당시 정치적 담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함
현대적 의미
영향현대 미국의 팽창주의적 경향에 영향
미국의 외교 정책에 대한 비판적 분석의 대상으로 여전히 논의됨
논쟁미국의 국제적 역할과 관련하여 논쟁의 주제로 남아있음
참고 자료
외부 링크미국의 명백한 운명
존 가스트, 아메리카 진보, 1872

2. 이론의 기원 및 배경

1845년 뉴욕 시의 저널리스트 존 오설리번은 서부로 계속 팽창하여 대륙 전체로 확대해 나가는 것은 "우리의 명백한 운명"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를 해마다 증가하는 수백만 인구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해 신이 베풀어 준 것이라고 설명했다.[14] 같은 해 12월 2일, 미국 대통령 제임스 K. 포크미국 의회에 먼로 독트린을 강화하고 미국이 서부로 더 활발하게 팽창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1840년정치인정부 지도자들은 시민들에게 북아메리카 대륙 전체로 영토를 확장하고 이를 응원하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라고 설득하기 위해 ‘명백한 운명’이라는 말을 널리 사용했다. 이론상으로는 자격 있는 모든 국민이 민주적인 자치 정부의 꿈을 이루려는 것이었지만, 현실적으로 이것은 아메리카 원주민과 비유럽계 조상을 가진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었다.

많은 미국 개척자들은 그들 국가의 자유와 이상이 매우 중요하며, 영토 확장을 통해 새로운 땅에 그것들을 전파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매사추세츠만 식민지의 주지사 존 윈스럽은 그의 식민지가 언덕 위의 도시가 되어 그 외의 세계에 자유와 신을 숭배하는 사회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줄 것이라고 했다. 프랭클린 피어스가 추진한 젊은 아메리카 운동은 그러한 시각을 강력하게 촉진시켰다.

명백한 운명을 정의하는 일련의 원칙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특정 정책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개념이었다. 명확하게 정의되지는 않았지만 강하게 느껴졌던 명백한 운명은 확장주의의 도덕성과 가치에 대한 확신의 표현이었으며, 미국 예외주의와 낭만적 민족주의를 포함한 당시의 다른 대중적인 사상들을 보완했다. "자유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 앤드류 잭슨은 미국의 잠재적인 위대함, 싹트는 낭만적 자기 정체성, 그리고 그 확장을 혼합한 전형적인 사례였다.[11][12]

잭슨은 명백한 운명의 기저를 이루는 원칙을 자세히 설명한 유일한 대통령은 아니었다. 옹호자들은 서로 다른 또는 모순되는 듯한 관점을 제시했다. 많은 작가들이 멕시코 또는 태평양 건너로의 미국 확장주의에 중점을 두었지만, 다른 작가들은 그 용어를 모범을 보이라는 요청으로 보았다. 미국의 운명에 대한 이러한 상반되는 견해는 결코 해결되지 않았다. 어니스트 리 투베슨은 "'명백한 운명'이라는 문구 아래에는 방대한 사상, 정책 및 행동의 복합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호환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의 출처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라고 요약했다.[13]

2. 1. 존 오설리번과 용어의 등장

1845년 뉴욕 시의 저널리스트 존 오설리번은 서부 팽창을 통해 대륙 전체로 확대해 나가는 것을 "우리의 명백한 운명"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해마다 증가하는 수백만 인구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해 신이 베풀어 준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14] 같은 해 12월 2일, 미국 대통령 제임스 K. 포크미국 의회에 먼로 독트린을 강화하고 미국이 서부로 팽창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존 L. 오설리번(John L. O'Sullivan)(1874년 스케치). 젊은 시절 영향력 있는 칼럼니스트였지만, 현재는 텍사스와 오리건 합병을 옹호하기 위해 "명백한 운명"이라는 문구를 사용한 것으로 주로 기억된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존 L. 오설리번이 1845년에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고 생각한다.[14] 그러나 다른 역사가들은 이 용어가 처음 등장한 "합병"(Annexation)이라는 제목의 무명의 사설이 기자이자 합병 옹호자인 제인 캐즈노(Jane Cazneau)가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15][16]

오설리번은 앤드루 잭슨의 민주주의(Jacksonian democracy)의 영향력 있는 옹호자였다.[17] 그는 1839년에 "명백한 운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평등, 양심의 자유, 개인의 참정권과 같은 가치를 바탕으로 미국의 "신성한 운명"을 예측하는 기사를 썼다.[18]

1845년, 오설리번은 ''민주적 검토(Democratic Review)''에 "합병"이라는 제목의 수필에서 처음으로 "명백한 운명"이라는 문구를 사용했다.[20][21] 그는 미국이 텍사스 공화국을 합병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우리의 수많은 백만 명의 해마다 증가하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해 섭리가 할당한 대륙을 널리 퍼뜨리고 소유하는 우리의 명백한 운명"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23] 휘그당의 반대를 극복하고, 민주당은 1845년에 텍사스를 합병했다. 오설리번이 처음 이 문구를 사용했을 때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24]

오설리번이 두 번째로 이 문구를 사용한 것은 1845년 12월 27일, 그의 신문인 ''뉴욕 모닝 뉴스(New York Morning News)''에서였다. 그는 영국과의 경계 분쟁에 대해 언급하며, 미국이 "오레곤 전체"를 주장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섭리가 미국에 공화주의 민주주의를 확산시키는 사명을 주었다고 믿었으며, 영국의 영토 주장은 무효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설리번은 명백한 운명이 다른 고려 사항보다 우선하는 도덕적 이상("더 높은 법")이라고 믿었다.[26]

오설리번의 원래 개념은 무력에 의한 영토 확장을 촉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의 확장이 미국 정부의 지시나 군사 개입 없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미국인들이 새로운 지역으로 이주한 후, 그들은 새로운 민주 정부를 수립하고 텍사스처럼 미국에 가입을 요청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1845년에 오설리번은 캘리포니아가 다음으로 이 패턴을 따를 것이며, 캐나다도 결국 합병을 요청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1846년 미국-멕시코 전쟁을 비판했지만, 그 결과가 양국 모두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27]

휘그당의 폴크 행정부 반대자들은 명백한 운명을 비판했다. 1846년 1월 3일, 로버트 윈쓰롭(Robert Winthrop) 대표는 의회에서 이 개념을 조롱했다.[29]

2. 2. 낭만적 민족주의와 미국 예외주의

'명백한 운명'은 미국 예외주의와 낭만적 민족주의 등 당시의 다른 대중적인 사상들을 보완했다. 앤드류 잭슨은 "자유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며 미국의 잠재적인 위대함, 싹트는 낭만적 자기 정체성, 그리고 그 확장을 혼합한 전형적인 사례였다.[11][12]

존 윈스럽은 그의 식민지가 언덕 위의 도시가 되어 그 외의 세계에 자유와 신을 숭배하는 사회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줄 것이라고 하였다. 많은 사람이 미국이 모든 북미 대륙을 차지하는 것은 신성한 임무라고 주장했다.[42] 토머스 제퍼슨루이지애나 매입으로 미국의 영토가 두 배로 늘어나면서, 미국의 대륙 팽창 기반을 마련했고, 많은 이들이 이를 새로운 섭리적인 사명의 시작으로 보았다. 미국이 "빛나는 산 위의 도시"로서 성공한다면, 다른 나라의 사람들도 자신들의 민주 공화정을 세우려 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42]

2. 3. 다양한 관점과 해석

'명백한 운명'은 일관된 정치 철학이라기보다는 여러 사상, 정책, 행동의 복합체였다.[13] 1840년대 정치인정부 지도자들은 시민들에게 북아메리카 대륙 전체로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 '운명'이라고 설득하기 위해 이 용어를 널리 사용했다.[11][12] 이론상으로는 모든 국민이 민주적인 자치 정부를 이루는 것이었지만, 현실적으로 아메리카 원주민과 비유럽계 조상을 가진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많은 미국 개척자들은 그들 국가의 자유와 이상이 매우 중요하며, 영토 확장을 통해 새로운 땅에 그것들을 전파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존 윈스럽은 그의 식민지가 언덕 위의 도시가 되어 자유와 신을 숭배하는 사회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줄 것이라고 했다. 프랭클린 피어스가 추진한 젊은 아메리카 운동은 그러한 시각을 강력하게 촉진시켰다.

'명백한 운명'을 정의하는 일련의 원칙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 확장주의의 도덕성과 가치에 대한 확신의 표현이었으며, 미국 예외주의와 낭만적 민족주의를 포함한 당시의 다른 대중적인 사상들을 보완했다. 앤드류 잭슨은 미국의 잠재적인 위대함, 낭만적 자기 정체성, 그리고 그 확장을 혼합한 전형적인 사례였다.

옹호자들은 서로 다른 또는 모순되는 듯한 관점을 제시했다. 많은 작가들이 멕시코 또는 태평양 건너로의 미국 확장주의에 중점을 두었지만, 다른 작가들은 그 용어를 모범을 보이라는 요청으로 보았다. 미국의 운명에 대한 이러한 상반되는 견해는 결코 해결되지 않았다. 어니스트 리 투베슨은 "'명백한 운명'이라는 문구 아래에는 방대한 사상, 정책 및 행동의 복합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호환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의 출처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라고 요약했다.[13]

3. 정치적 이해와 갈등

미국의 주민들이 서부로 뻗어 나가면서, 아메리카 토착민과 멕시코 양측과의 감정적인 대립은 피할 수 없었다. 질병으로 인구가 크게 줄어든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침략해 오는 정착민과 그들의 앞선 군대에 맞서는 것은 불가능했다. 서부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이 급속히 사라진 것은 미국 역사의 큰 오점 중 하나이며, 눈물의 길과 같은 사건은 당시 만연했던 원주민 학살의 예시이다.[2]

멕시코와의 대립은 좀 더 형식적이었으나, 결과적으로 미국 정착민들에게 대규모 땅을 획득하게 했다. 제임스 K. 포크 대통령은 멕시코 영토를 조금이라도 더 미국의 소유로 만들려는 의도를 일기에서 밝혔다. '명백한 운명'의 이 두 가지 결과는 소수 집단에게 다수 집단의 규칙을 강요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보여준다.

미첼의 텍사스, 오리건, 캘리포니아 신지도, 1846년


역사학자 프레더릭 머크(Frederick Merk)는 1963년에 명백한 운명 개념이 "새로운 천국 건설을 위한 새로운 땅의 잠재력에 의해 생성된… 고귀한 본보기로 구세계를 구원하려는 사명감"에서 비롯되었다고 기술했다. 또한 명백한 운명은 국가 내에서 격렬하게 논쟁된 개념이었다고 말한다.

인종적 우월성, 즉 미국 앵글로색슨족이 "분리되어 타고나게 우월하며" "미국 대륙과 세계에 좋은 정부, 상업적 번영 및 기독교를 가져올 운명"이라는 생각도 명백한 운명에 영향을 주었다. 작가 레지널드 호스먼(Reginald Horsman)은 1981년에 이 견해가 "열등한 인종은 종속적인 지위나 멸종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했으며, 이것이 "흑인 노예화와 인디언 추방 및 가능한 멸종"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썼다.[31]

미국의 예외주의의 기원은 청교도 유산, 특히 존 윈스롭의 1630년 "산 위의 도시" 설교로 거슬러 올라간다. 토머스 페인상식에서 미국 독립 혁명이 새롭고 더 나은 사회를 창조할 기회를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많은 미국인들이 페인에게 동의했고, 미국의 미덕이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특별한 실험의 결과라고 믿었다. 토머스 제퍼슨제임스 먼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의 빠른 증가가 그 한계를 넘어 확장되어 북쪽 대륙이 아니라면 남쪽 대륙 전체를 덮을 먼 미래를 내다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썼다.[33] 독립 선언 이후 미국인들은 "새로운 시간 척도"의 시작으로 세상을 보았고, 이러한 신념을 확장하고 보존할 의무를 세계에 졌다.[34]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1862년 12월 1일 의회에 보낸 메시지에서 미국을 "지구상의 마지막이자 최고의 희망"으로 묘사했다. 링컨은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미국 남북 전쟁을 민주적 이상을 가진 국가가 살아남을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투쟁으로 해석했다.[35]

신이 미국의 기초와 그 이후의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믿음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클린턴 로시터는 이 견해를 "신이 역사의 행진에서 적절한 단계에서 구세계의 특권적인 국가들에서 특정한 강인한 영혼들을 불러냈고… 은총을 베푸는 것과 함께 특별한 책임을 부여했다"고 요약했다. 미국인들은 북미 대륙을 유지하는 데 신성하게 선택되었을 뿐만 아니라 "권리장전에 명시된 기본 원칙을 널리 전파"할 책임도 있다고 믿었다.[36]

존 맥 파라거는 1997년 민주당과 휘그당 사이의 정치적 양극화를 분석했다.

최근 두 명의 미국 원주민 작가는 명백한 운명의 주제를 15세기 기독교 발견 교리의 이념과 연결하려 했다.[38] 닉 에스테스(라코타족)는 유럽 국가의 확장에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구별하는 15세기 가톨릭 교리를 연결한다. 에스테스와 토냐 고넬라 프라이히너(온온다가족)는 발견 교리를 ''존슨 대 맥킨토시''와 연결하고, 존 마셜 대법관이 "미국의 원주민 토지에 대한 권리를 설명했고" 자신의 진술에 발견 교리를 인용하면서 명백한 운명과 기독교 발견 교리의 상관관계를 주장한다.[38][39] 마셜은 "원주민들은 '점유' 권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들의 토지는 '발견' 권력에 의해 빼앗길 수 있다"고 판결했다.[39] 프라이히너는 "새로 설립된 미국은 미국 인디언의 정치적 정체성과 인디언 토지 개념을 만들어 미국과 서부 식민지 확장의 길을 열 필요가 있었습니다."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명백한 운명은 아메리카의 원래 유럽 식민지화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미국 원주민 부족에 대한 미국의 폭력을 정당화한다.[38]

도르세타 테일러는 "소수 민족은 일반적으로 탐험가나 환경 운동가로 기록되지 않지만, 역사적 기록은 그들이 탐험대의 일부였고, 국경 지역에 거주하고 일했으며, 마을을 건설했고, 교육자이자 기업가였음을 보여줍니다. 간단히 말해, 유색인종은 서부 확장에서 매우 중요한 행위자였습니다."라고 말했다.[40]

중국 및 기타 아시아 국가와의 무역에 대한 열망은 또 다른 확장주의의 근거였다. 미국인들은 아시아와의 서부 접촉을 아시아로 가는 새로운 경로를 찾으려는 서구의 희망을 이루는 것으로 보았다. 태평양은 대서양보다 덜 무질서하고 구세계의 갈등이 지배하지 않는 지역으로 인식되어 새로운 국가가 그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는 더 매력적인 지역이었다.[41]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으로 미국의 영토가 두 배로 늘어나면서,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의 대륙 팽창의 기반을 마련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새로운 섭리적인 사명의 시작으로 보았다.[42]

3. 1. 서부 확장과 원주민/멕시코와의 갈등

미국의 주민들이 서부로 뻗어 나가면서, 아메리카 토착민들과 멕시코 양측과의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질병으로 이미 인구가 크게 줄어든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몰려오는 정착민과 그들의 앞선 군대에 맞서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서부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이 급격히 사라진 것은 미국 역사의 큰 오점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눈물의 길과 같은 비극적인 사건은 당시 만연했던 원주민 학살의 한 예에 불과하다.[2]

멕시코와의 대립은 좀 더 공식적인 형태였지만, 결과적으로 미국 정착민들에게 막대한 땅을 안겨주었다. 제임스 K. 포크 대통령은 멕시코 영토를 조금이라도 더 미국의 소유로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자신의 일기에서 밝히고 있다. '명백한 운명'의 이 두 가지 결과는 소수 집단에게 다수의 규칙을 강요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최초로 오리건 지역에 발을 들여놓은 미국인은 농부가 아니라 모피 상인이었다. 그들은 동부와 유럽에서 인기가 높았던 비버 가죽을 얻기 위해 오리건을 개척했는데, 처음에는 아메리카 원주민이 공급한 모피를 거래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이 서부로 이주하면서, 늘어난 모피 수요를 맞추기 위해 개척민들도 사냥을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아메리카 원주민의 사업을 빼앗아 버렸다. 모피 상인들은 비버 가죽을 두고 다른 상인, 아메리카 원주민, 그리고 서부로 이주해 오는 새로운 정착민들과 경쟁해야 했다. 이로 인해 비버의 개체 수가 줄어들었고, 개척민들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 더 먼 서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1840년대에 이르러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젊은 개척자들이 오리건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오리건까지 가는 길은 2000마일이나 되는 험난한 여정이었고, 임산부, 병자, 노인만이 수레를 이용했을 뿐, 나머지는 이 먼 거리를 걸어야 했다. 이들은 오리건에 도착하여 영토 소유권을 두고 아메리카 원주민과 잦은 충돌을 겪었으며, 전투도 빈번했다.

아메리카 원주민은 미국인의 끊임없는 서부 확장에 큰 영향을 받았고, 생존을 위해 저항해야 했다. 그들은 국경 지방 사람들과 짐승의 가죽, 털, 모피 장사를 두고 경쟁해야 했으며, 텍사스에 농사짓고자 하는 멕시코인과도 영토를 다퉈야 했다.

텍사스 주민과 멕시코인 역시 이 팽창에 큰 영향을 받았다. 미국의 개척자들에게 밀려난 아메리카 원주민이 멕시코인의 농지 및 거주지로 이동하면서 문제가 발생했고, 너무 많은 사람이 텍사스 땅으로 몰려들었다. 미국과 멕시코는 텍사스 땅 소유권을 위한 투쟁을 강화했다.

영국은 17세기 초까지 오리건의 작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영국인에게 북서부 아메리카 내에서의 상업에 많은 이점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미국인 개척자들의 수가 영국 상인을 압도하기 시작하자, 영국인은 오리건 지방을 미국에 넘기라는 압력을 받게 되고, 결국 인구가 적은 캐나다로 옮기게 된다. 오리건 지방까지 손에 넣은 미국은 대서양부터 태평양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모두 손에 넣으며 ‘명백한 운명’을 실현하게 되었다.

1845년 존 오설리번이 처음 사용한 "명백한 운명"이라는 표현은 당시 미국의 텍사스 공화국 합병을 지지하는 말이었으며, 이후 미국의 팽창을 "문명화"·"천명"으로 간주하여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과 서부 진출을 정당화하는 구호가 되었다.

율리시스 S. 그랜트는 멕시코 전쟁에 참전했고, 훗날 이 전쟁을 강대국이 약소국을 상대로 벌인 가장 부당한 전쟁 중 하나로 평가했다.[45]

명백한 운명은 미국 원주민들에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는데, 대륙 확장은 암묵적으로 원주민들의 땅 점령과 합병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는 인디언 강제 이주를 통해 여러 원주민 부족들과의 충돌과 전쟁으로 이어졌다.[96][97][98][99] 미국은 원주민의 제한적인 토지 권리를 인정하는 유럽의 관행을 계속 이어갔다. 워싱턴 행정부의 전쟁장관인 헨리 녹스가 주로 수립한 정책에 따라 미국 정부는 조약을 통해 원주민의 땅을 매입하여 서부로 확장하려 했다. 연방 정부만이 인디언의 땅을 매입할 수 있었고, 이는 부족 지도자들과의 조약을 통해 이루어졌다.

"인디언 강제 이주"라는 개념은 명백한 운명의 맥락에서 힘을 얻었고, 토머스 제퍼슨이 이 문제에 대한 주요 정치적 목소리 중 하나였기 때문에, 미국 원주민이 백인 정착민으로부터 멀리 이주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믿는 지지자들이 많아졌다.[102] 1830년 앤드류 잭슨이 인디언 강제 이주법에 서명하면서 이 이주 노력은 정책을 통해 더욱 공고해졌다.[105]

많은 원주민의 강제 이주 이후, 미국인들은 미국이 확장됨에 따라 원주민의 생활 방식이 결국 사라질 것이라고 점점 더 믿게 되었다.[106]

3. 2. 노예제 문제와 남북 갈등

Manifest Destiny영어는 1840년대 민주당원들이 서부 확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였지만, 이 개념 자체는 그 이전부터 존재했다. 노예제 문제는 Manifest Destiny영어와 얽혀 미국의 영토 확장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46]

1836년 텍사스 공화국은 멕시코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텍사스 혁명 이후 미국에 합류를 요청했다. 이는 제퍼슨 시대부터 구상된 이상적인 확장 과정으로, 민주적이고 독립적인 주가 자발적으로 연방에 편입되는 형태였다. 그러나 텍사스 합병은 노예주를 추가하여 연방의 균형을 깨뜨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노예제 옹호 세력의 반발을 샀다. 앤드류 잭슨 대통령과 마틴 밴 뷰런 대통령은 노예제 문제가 당을 분열시킬 것을 우려하여 텍사스 합병을 주저했다.[65]

1844년 대선에서 휘그당 후보 헨리 클레이와 민주당 유력 후보였던 밴 뷰런은 모두 텍사스 합병에 반대하여 이 문제가 선거 쟁점이 되는 것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예상을 깨고 텍사스 합병을 지지하는 제임스 K. 포크를 후보로 선출했다. 포크는 텍사스 합병 문제를 오리건 분쟁과 연결시켜 지역 간 타협을 시도했다. 북부 확장론자들은 오리건 점령을, 남부 확장론자들은 텍사스 합병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근소한 차이로 당선된 포크는 자신의 승리를 확장에 대한 국민의 지지로 해석했다.[66]

율리시스 S. 그랜트멕시코-미국 전쟁에 참전한 후, 텍사스 합병과 그로 인한 전쟁을 강대국이 약소국을 상대로 벌인 부당한 전쟁 중 하나로 평가했다. 그는 이를 영토 확장을 위해 정의를 무시한 유럽 군주국의 나쁜 선례를 따른 것이라고 비판했다.[45]

19세기 중반, 특히 쿠바를 향한 남부로의 확장은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후 미국에 더 많은 영토가 추가되면서, 남부인들에게 "자유의 영역 확장"은 노예제 확장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노예제는 미국 남북 전쟁 이전 미국의 대륙 팽창에서 핵심적인 문제가 되었다.[46]

3. 3. 휘그당과 민주당의 대립

1845년 존 오설리번이 처음 사용한 '명백한 운명'이라는 용어는 당시 텍사스 공화국 합병을 지지하는 표현이었다. 이후 미국의 팽창을 "문명화"·"천명"으로 간주하여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과 서부 진출을 정당화하는 구호가 되었다.[135] 그러나 모든 미국인이나 정치 지도자들이 이러한 팽창주의적 사고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많은 휘그당원들은 민주당의 영토 확장 주장에 반대했다. 이들은 미국이 다른 나라들에게 모범이 될 운명이라는 점은 인정했지만, 북미 대륙 전체로 영토를 확장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너무 넓게 퍼져나가는 것을 두려워했고", "제한된 지역에 국가 권력을 집중시키는 것"을 선호했다.[43] 1848년 7월, 알렉산더 스테픈스는 폴크 대통령의 팽창주의적 미래관을 비판했다.[44]

반면, 민주당은 '명백한 운명'을 지지하며 영토 확장을 옹호했다.

4. 명백한 운명의 전개

프레더릭 머크(Frederick Merk)는 1963년에 명백한 운명 개념이 "새로운 천국 건설을 위한 새로운 땅의 잠재력에 의해 생성된… 고귀한 본보기로 구세계를 구원하려는 사명감"에서 비롯되었다고 기술했다. 머크는 또한 명백한 운명이 국가 내에서 격렬하게 논쟁된 개념이었다고 말한다.[9]

가능한 영향 중 하나는 인종적 우월성, 즉 미국 앵글로색슨족이 "분리되어 타고나게 우월하며" "미국 대륙과 세계에 좋은 정부, 상업적 번영 및 기독교를 가져올 운명"이라는 생각이다.[31]

이후 미국의 예외주의로 알려지게 된 첫 번째 주제의 기원은 종종 미국의 청교도 유산, 특히 존 윈스롭(John Winthrop)의 1630년 "산 위의 도시" 설교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이 설교에서 구세계에 빛나는 본보기가 될 덕이 있는 공동체의 건설을 촉구했다.[32] 토머스 페인(Thomas Paine)은 1776년 소책자 ''상식''에서 미국 독립 혁명이 새롭고 더 나은 사회를 창조할 기회를 제공한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개념을 반복했다.

많은 미국인들이 페인에게 동의했고, 미국의 미덕이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특별한 실험의 결과라고 믿었다.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제임스 먼로(James Monroe)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의 빠른 증가가 그 한계를 넘어 확장되어 북쪽 대륙이 아니라면 남쪽 대륙 전체를 덮을 먼 미래를 내다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썼다.[33]

두 번째 주제의 기원은 덜 명확하다. 미국의 사명에 대한 대중적인 표현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1862년 12월 1일 의회에 보낸 메시지에서 "지구상의 마지막이자 최고의 희망"으로 미국을 묘사하며 자세히 설명했다. 링컨은 미국 남북 전쟁을 민주적 이상을 가진 국가가 살아남을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투쟁으로 해석한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미국의 "사명"을 더욱 자세히 설명했다. 이는 역사학자 로버트 요한센(Robert Johannsen)에 의해 "미국의 명백한 운명과 사명에 대한 가장 오래 지속되는 진술"이라고 불렸다.[35]

세 번째 주제는 신이 미국의 기초와 그 이후의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믿음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볼 수 있다. 정치학자이자 역사가인 클린턴 로시터(Clinton Rossiter)는 이 견해를 "신이 역사의 행진에서 적절한 단계에서 구세계의 특권적인 국가들에서 특정한 강인한 영혼들을 불러냈고… 은총을 베푸는 것과 함께 특별한 책임을 부여했다"고 요약했다. 미국인들은 북미 대륙을 유지하는 데 신성하게 선택되었을 뿐만 아니라 "권리장전에 명시된 기본 원칙을 널리 전파"할 책임도 있다고 믿었다.[36]

존 맥 파라거(John Mack Faragher)의 1997년 민주당과 휘그당 사이의 정치적 양극화에 대한 분석은 다음과 같다.

최근 두 명의 미국 원주민 작가는 명백한 운명의 주제 중 일부를 15세기 기독교 발견 교리의 원래 이념과 연결하려 했다.[38] 닉 에스테스(라코타족)는 유럽 국가의 확장에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구별하는 15세기 가톨릭 교리를 연결한다.[38] 에스테스와 국제 법률 전문가 토냐 고넬라 프라이히너(온온다가족)는 발견 교리를 ''존슨 대 맥킨토시''와 연결하고, 그 사건 중 대법관 존 마셜(John Marshall)이 "미국의 원주민 토지에 대한 권리를 설명했고" 자신의 진술에 발견 교리를 인용하면서 명백한 운명과 기독교 발견 교리의 상관관계에 대한 주장을 제기한다.[38][39]

역사학자 도르세타 테일러(Dorceta Taylor)는 "소수 민족은 일반적으로 탐험가나 환경 운동가로 기록되지 않지만, 역사적 기록은 그들이 탐험대의 일부였고, 국경 지역에 거주하고 일했으며, 마을을 건설했고, 교육자이자 기업가였음을 보여준다. 간단히 말해, 유색인종은 서부 확장에서 매우 중요한 행위자였다."라고 기록했다.[40]

중국 및 기타 아시아 국가와의 무역에 대한 열망은 또 다른 확장주의의 근거였으며, 미국인들은 아시아와의 서부 접촉을 아시아로 가는 새로운 경로를 찾으려는 오랫동안 지속된 서구의 희망을 이루는 것으로 보았다.[41]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으로 미국의 영토가 두 배로 늘어나면서,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의 대륙 팽창의 기반을 마련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새로운 섭리적인 사명의 시작으로 보았다.[42]

그러나 모든 미국인이나 정치 지도자들이 미국이 신의 총애를 받는 국가라고 믿었거나, 미국이 확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많은 휘그당원들은 미국이 세상의 다른 나라들에게 덕 있는 모범이 될 운명이며, 북미 대륙 전역에 우월한 정치 체제와 삶의 방식을 퍼뜨릴 신성한 의무가 있다는 민주당의 주장에 근거하여 영토 확장에 반대했다.[43] 1848년 7월, 알렉산더 스테픈스는 포크 대통령의 미래에 대한 팽창주의적 해석을 "허위"라고 비난했다.[44]

율리시스 S. 그랜트멕시코-미국 전쟁에서 복무했고, 이후 "나는 그 조치(텍사스 합병)에 대해 매우 반대했고, 오늘날까지도 그 결과 발생한 [멕시코와의] 전쟁을 강국이 약국에 대해 벌인 가장 부당한 전쟁 중 하나로 생각한다. 이는 공화국이 추가 영토를 획득하려는 욕망에서 정의를 고려하지 않는 유럽 군주제의 나쁜 본보기를 따른 사례였다."라고 썼다.[45]

19세기 중반, 특히 쿠바를 향한 남쪽으로의 팽창주의는 노예제를 폐지하려는 미국인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그렇기 때문에 노예제는 남북 전쟁 이전 미국의 대륙 팽창에서 중심적인 문제 중 하나가 되었다.[46] 남북 전쟁 전후로 양측 모두 미국의 운명이 정당하게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링컨은 반이민 토착주의와 명백한 운명의 제국주의를 부당하고 불합리하다고 반대했다.[47]

1845년 존 오설리번(John O'Sullivan)이 처음 사용한 "명백한 운명"은 당시에는 미국의 텍사스 공화국 합병을 지지하는 표현이었으나, 이후 미국의 팽창을 "문명화"·"천명"으로 간주하여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과 서부 진출을 정당화하는 구호가 되었다. 19세기 말 "프런티어"가 사실상 소멸하자, 미국-스페인 전쟁, 미국-멕시코 전쟁, 필리핀-미국 전쟁, 하와이 합병 등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영토 확장과 패권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말이 되었다.

영국의 제국주의 정치가 조셉 체임벌린(Joseph Chamberlain)도 "매니페스트 데스티니"라는 말을 사용하여, "앵글로색슨 민족은 식민지 경영에 가장 적합한 민족이며, 아프리카에 문명을 가져올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135]

4. 1. 오리건 영토 분쟁

1818년 영국-미국 조약은 오리건 준주의 공동 점유를 규정했고, 1840년대에 수천 명의 미국인들이 오리건 트레일을 따라 이곳으로 이주했다. 미국 대통령 존 타일러북위 49도선을 따라 지역을 분할하자는 제안을 했으나, 영국은 컬럼비아 강을 따라 더 남쪽에 있는 경계선을 제안하며 거부했다. 이는 나중에 워싱턴주가 된 지역의 대부분을 영국 북아메리카의 일부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에 미국의 운명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항의하며 알래스카 선(54°40ʹ N)까지 오리건 준주 전체를 병합할 것을 요구했다. 대통령 후보 폴크는 이러한 대중적 분노를 자신의 이점으로 활용했고, 민주당은 184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모든 오리건"의 병합을 요구했다.[61]

에마누엘 로이체의 그림 ''서쪽으로 제국이 나아간다''(1861)는 미국의 서부 진출을 이상화하여 보여준다.


폴크는 대통령이 된 후 타협을 모색, 북위 49도선을 따라 영토를 나누는 이전 제안을 다시 제시했지만, 미국의 운명을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은 실망했다. 영국이 이 제안을 거절하자 미국의 확장주의자들은 "오리건 전체 또는 아무것도 아니다", "54-40 또는 전쟁"과 같은 구호를 외쳤다. 폴크가 공동 점유 협정을 종식시키려 하자, 영국은 마침내 1846년 초에 북위 49도선을 따라 지역을 분할하는 데 동의하여 컬럼비아 강 유역 하류를 미국의 일부로 남겼다. 1846년 오리건 조약은 공식적으로 분쟁을 해결했다. 폴크 행정부는 미국-멕시코 전쟁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고, 대통령과 다른 사람들은 영국과도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상원에서 조약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모든 오리건"을 요구했던 이전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오리건 조약은 미국에서 인기가 많았고 상원에서 쉽게 비준되었다. 레지널드 C. 스튜어트에 따르면, 미국의 운명을 가장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이 북쪽 국경에서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대륙주의'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운명의 나침반은 북쪽이 아니라 서쪽과 남서쪽을 가리켰기 때문"이다.[62]

4. 2. 멕시코-미국 전쟁과 영토 획득

리오 산 가브리엘 전투는 멕시코-미국 전쟁(1846-1848)의 결정적인 전투로, 캘리포니아 정복의 일부였다.


명백한 운명은 텍사스 확장과 미국-멕시코 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64] 1836년, 텍사스 공화국멕시코로부터 독립을 선언했고, 텍사스 혁명 이후 미국에 합류하려 했다. 이는 제퍼슨부터 오설리번까지 주장해 온 이상적인 확장 과정이었다. 즉, 새롭게 민주적이고 독립적인 주들이 미국에 가입을 요청하는 것이지, 미국이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정부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텍사스 합병은 노예제를 옹호하는 이들의 공격을 받았는데, 노예주를 연방에 추가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앤드류 잭슨 대통령과 마틴 밴 뷰렌 대통령은 노예제 문제가 민주당을 분열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텍사스의 미국 합류 제안을 거절했다.[65]

1844년 선거 전에, 휘그당 후보 헨리 클레이와 민주당 후보로 예상되던 전 대통령 밴 뷰렌은 모두 텍사스 합병에 반대한다고 선언하여, 이 문제가 선거의 쟁점이 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이는 예상과 달리 밴 뷰렌이 텍사스 합병을 지지한 포크로 민주당 후보가 교체되는 결과를 낳았다. 포크는 텍사스 합병 문제를 오리건 분쟁과 연결시켜 확장에 대한 일종의 지역적 타협을 제시했다. (북부의 확장주의자들은 오리건 점령을 더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경향이 있었던 반면, 남부의 확장주의자들은 주로 텍사스 합병에 집중했다.) 포크는 근소한 차이로 당선되었지만, 마치 자신의 승리가 확장에 대한 국민적 지시인 것처럼 행동했다.[66]

포크의 당선 이후, 취임 전에 의회는 텍사스 합병을 승인했다. 포크는 1836년에 멕시코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지만 여전히 멕시코가 영유권을 주장하던 텍사스 지역 일부를 점령하려 했다. 이는 1846년 4월 24일 멕시코-미국 전쟁 발발의 원인이 되었다. 1847년 여름까지 미국의 전장에서의 승리로, 특히 동부 민주당원들 사이에서 "전 멕시코" 합병에 대한 요구가 있었는데, 그들은 멕시코를 연방에 편입하는 것이 지역의 미래 평화를 보장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주장했다.[67]

그러나 이는 두 가지 이유로 논란이 많은 제안이었다. 첫째, 오설리번과 같은 명백한 운명의 이상적인 옹호자들은 항상 미국의 법이 사람들의 의지에 반하여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 왔는데, "전 멕시코" 합병은 이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둘째, 멕시코 합병은 유색 인종이 대다수이고 가톨릭교도인 수백만 명의 멕시코인들에게 미국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논란이 되었다. 텍사스 합병을 승인했던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존 C. 칼훈 상원의원은 인종적인 이유로 멕시코 합병과 명백한 운명의 "사명" 측면 모두에 반대했다.[68] 그는 1848년 1월 4일 의회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밝혔다.

> 우리는 코카서스 인종, 즉 자유 백인 인종 이외의 어떤 인종도 우리 연합에 편입시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멕시코를 편입시키는 것은 멕시코인의 절반 이상이 인디언이고 나머지는 주로 혼혈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인디언 인종을 편입시키는 그러한 첫 번째 사례가 될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연합에 반대합니다! 우리는 백인 인종의 정부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 정부를 강요하기를 열망합니다. 그리고 저는 … 이 나라의 사명이 전 세계, 특히 이 대륙에 시민적 및 종교적 자유를 널리 전파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큰 실수입니다.[69][70]

이 논쟁은 명백한 운명의 모순 중 하나를 드러냈다. 한편으로, 명백한 운명에 내재된 정체성 개념은 비백인인 멕시코인들이 백인 인종의 완전성에 대한 위협이 될 것이며 따라서 미국인이 될 자격이 없다고 시사했지만, 명백한 운명의 "사명" 구성 요소는 멕시코인들이 미국 민주주의에 편입됨으로써 향상될 것이라고 시사했다. 정체성은 명백한 운명을 지지하는 데 사용되었지만, 칼훈과 "전 멕시코" 운동에 대한 저항의 경우처럼 명백한 운명에 반대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71] 반대로, "전 멕시코" 합병 지지자들은 그것을 반노예제 조치로 간주했다.[72]

1840년부터 1850년까지의 성장


이 논쟁은 결국 멕시코 할양으로 종결되었는데, 이로써 멕시코보다 인구 밀도가 훨씬 낮은 알타 캘리포니아와 누에보멕시코 영토가 미국에 추가되었다. "전 오레곤" 운동과 마찬가지로 "전 멕시코" 운동도 빠르게 쇠퇴했다.

역사가 프레데릭 머크는 "미국 역사에서의 명백한 운명과 사명: 재해석"(1963)에서 "전 오레곤"과 "전 멕시코" 운동의 실패는 명백한 운명이 역사가들이 전통적으로 묘사해 온 것만큼 인기가 없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머크는 민주주의의 이로운 사명에 대한 믿음이 미국 역사의 중심이었지만, 공격적인 "대륙주의"는 소수의 미국인(모두 민주당원)만이 지지하는 일탈이었다고 썼다. 일부 민주당원들도 반대했다. 루이지애나의 민주당원들은 멕시코 합병에 반대했고,[73] 미시시피의 민주당원들은 찬성했다.[74]

이러한 사건들은 멕시코-미국 전쟁과 관련이 있으며 당시 남부 평원에 살던 미국 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데이비드 베이리스의 사례 연구는 이 기간 동안 벤트, 생브랭 앤 컴퍼니라는 모피 무역 및 인디언 무역 사업 운영을 통해 이러한 영향을 보여준다. 이 회사의 이야기는 명백한 운명 개념이 모든 미국인에게 만장일치로 지지받은 것이 아니었고 항상 미국인들에게 이익이 된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이 사례 연구는 영토 확장의 이름으로 이 회사가 몰락할 수도 있었음을 시사한다.[75]

4. 3. 필리버스터링과 쿠바 문제

1848년 멕시코-미국 전쟁 이후, 노예제 확장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해 추가적인 영토 병합은 어려운 문제가 되었다. 존 퀴트먼(John Quitman)과 같은 일부 인사들은 필리버스터링을 지지하며, 미시시피 주 병기고의 무기가 필리버스터들의 손에 넘어간 사건을 예로 들었다.[76] 그러나 북부에서는 필리버스터링을 남부 노예 소유주들과 그들의 북부 동맹 세력들이 노예제를 확장하려는 시도로 간주하여 반대했다. 사라 파커 레몽(Sarah Parker Remond)은 필리버스터링과 노예 세력 간의 연관성이 미국 정부 시스템의 부패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했다.[76]

이러한 상황에서 명백한 운명을 강하게 옹호하는 사람들은 군사적 필리버스터링으로 눈을 돌렸다. 필리버스터는 원래 서인도 제도에서 스페인 상업을 약탈하던 해적을 의미했지만, 1830년대 후반 캐나다에 대한 원정을 거쳐 19세기 중반에 명확한 용어로 자리 잡았다. ''뉴욕 데일리 타임스(New-York Daily Times)''는 "필리버스터 열풍"을 언급할 정도였다.[78] 밀러드 필모어(Millard Fillmore) 대통령은 1851년 연례 메시지에서 필리버스터 활동에 대해 큰 비중을 두었다.[79]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로 여러 차례 원정을 떠나 니카라과(Nicaragua)를 통치하고 영국 해군에 체포되기 전 온두라스(Honduras) 정부에 의해 처형된 필리버스터 윌리엄 워커.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1840년대 후반과 1850년대 초의 필리버스터링 작전은 미국에서 미화되었다. 민주당은 니카라과(Nicaragua)에서 윌리엄 워커의 필리버스터링을 지지하는 조항을 전국 강령에 포함시켰다. 부유한 미국 확장주의자들은 라틴 아메리카를 주요 표적으로 삼아 원정대에 자금을 지원했다.[80] 윌리엄 워커는 멕시코의 소노라와 바하 캘리포니아 주를 분리하려는 시도를 했고,[81] 나르시소 로페즈(Narciso López)는 스페인 제국(Spanish Empire)으로부터 쿠바를 확보하려 했다.

미국은 오랫동안 쿠바에 관심을 가졌다. 1848년 폴크 대통령은 스페인에 쿠바를 1억 달러에 매입할 것을 제안했지만, 스페인은 거절했다.[82] 이후 재커리 테일러(Zachary Taylor)와 밀러드 필모어(Millard Fillmore) 대통령은 필리버스터 원정을 진압하려 했다. 1852년 프랭클린 피어스(Franklin Pierce) 대통령은 쿠바 획득을 위한 필리버스터링을 잠정적으로 지지했지만, 1854년 오스텐드 선언(Ostend Manifesto)이 알려지면서 섬 획득 노력은 무산되었다.[83]

윌리엄 워커와 같은 필리버스터들은 1850년대 후반에도 활동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확장주의는 남북 전쟁의 원인 중 하나였으며, 노예제 확장 문제로 인해 북부와 남부는 명백한 운명을 다르게 정의하여 민족주의를 약화시켰다.[84]

4. 4. 알래스카 매입

1867년 미국은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입했다. 당시 국무장관 윌리엄 H. 수어드는 러시아 공사 에두아르 드 스토클과 협상을 진행했다. 크림 전쟁 이후 러시아는 영국과의 전쟁에서 알래스카를 잃을 것을 우려하여 매각을 결정했다. 처음에는 500만 달러가 제안되었으나, 최종적으로 7200000USD에 합의되어 1867년 3월 30일 상원에서 조약이 비준되었다.[91] 10월 18일 알래스카주 시트카에서 인수식이 열렸고, 러시아 국기가 내려가고 미국 국기가 게양되었다.

이 매입으로 미국은 의 새로운 영토를 얻었다. 이는 텍사스의 약 두 배에 달하는 면적이다. 수어드를 포함한 매입 찬성론자들은 아시아와의 무역 확장을 위한 기지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91] 그러나 일부 반대자들은 이 매입을 "수어드의 어리석음" 또는 "수어드의 냉장고"라고 비판하며 쓸모없는 땅을 샀다고 주장했다.[92]

매입 이후 거의 모든 러시아 정착민들이 알래스카를 떠났고, 1896년 클론다이크 골드 러시 이전까지 새로운 정착민은 거의 없었다. 알래스카는 알래스카 부서, 알래스카 지구, 알래스카 준주를 거쳐 1959년 현재의 알래스카주가 되었다.

5. 명백한 운명의 유산과 영향

19세기 말 서부 확장이 가져온 변화는 매우 컸으며, 이를 추진했던 사람들조차 예상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오리건 지역은 기대만큼 비옥했지만, 강수량이 많고 예상보다 멀리 떨어져 있었다. 1849년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고 다른 지역에서도 풍부한 광물이 발견되면서, 몇몇 거대 신흥 산업 왕국이 빠르게 성장했다. 남북전쟁과 노예 해방 운동으로 인한 혼란은 새로운 땅을 찾아 서부로 이주하는 사람들을 더욱 늘렸다. 이러한 갈등의 중심에 '국가의 명백한 운명'에 노예 제도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1846년~1848년에 발발한 멕시코-미국 전쟁은 명백한 운명에 대한 믿음이 주요 원인 중 하나였으며, 이 전쟁을 통해 미국은 알타 캘리포니아와 누에보 멕시코를 점령했다.

''명백한 운명''과 함께 도덕적, 정치적, 그리고 인종적 우월성에 대한 여러 주장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몰아내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백인의 책무와 같은 유사한 이론들은 유럽을 비롯한 세계 전반이 아프리카아시아를 식민지로 정복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명백한 운명"이라는 표현은 캐나다미국의 관계에 대한 논의에서 캐나다 내에서 종종 언급된다. 일부 캐나다인들은 미국이 캐나다 영토를 합병하여 자국의 명백한 운명을 이루려는 의도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고 믿고 있다. (참고: 51번째 주)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으로 미국의 영토가 두 배로 늘어나면서,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의 대륙 팽창의 기반을 마련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새로운 섭리적인 사명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미국이 "빛나는 산 위의 도시"로서 성공한다면, 다른 나라들도 자신들의 민주 공화정을 세우려 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42]

하지만 모든 미국인이나 정치 지도자들이 미국이 신의 총애를 받는 국가라고 믿었거나, 미국이 확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많은 휘그당원들은 미국이 세상의 다른 나라들에게 모범이 될 운명이며, 북미 대륙 전체에 우월한 정치 체제와 삶의 방식을 퍼뜨릴 신성한 의무가 있다는 민주당의 주장에 근거하여 영토 확장에 반대했다. 휘그당원들은 "너무 넓게 퍼져나가는 것을 두려워했고", "제한된 지역에 국가 권력을 집중시키는 것"을 고수했다.[43] 1848년 7월, 알렉산더 스테픈스는 포크 대통령의 미래에 대한 팽창주의적 해석을 "허위"라고 비난했다.[44]

율리시스 S. 그랜트는 멕시코 전쟁에 참전했고, 이후 다음과 같이 썼다.

> 저는 그 조치(텍사스 합병)에 대해 매우 반대했고, 오늘날까지도 그 결과 발생한 [멕시코와의] 전쟁을 강국이 약국에 대해 벌인 가장 부당한 전쟁 중 하나로 생각합니다. 이는 공화국이 추가 영토를 획득하려는 욕망에서 정의를 고려하지 않는 유럽 군주제의 나쁜 본보기를 따른 사례였습니다.[45]

19세기 중반, 특히 쿠바를 향한 남쪽으로의 팽창주의는 노예제를 폐지하려는 미국인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미국에 더 많은 영토가 추가됨에 따라, 남부인들의 마음속에서 "자유의 영역을 확장한다"는 것은 노예 제도를 확장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노예제는 남북 전쟁 이전 미국의 대륙 팽창에서 중심적인 문제 중 하나가 되었다.[46]

남북 전쟁 전후로 양측 모두 미국의 운명이 정당하게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링컨은 반이민 토착주의와 명백한 운명의 제국주의를 부당하고 불합리하다고 반대했다.[47] 그는 멕시코 전쟁에 반대했고, 이러한 애국주의 형태가 도덕적이고 형제적인 자유와 연합의 유대를 위협한다고 믿었다. 링컨의 "헨리 클레이에 대한 찬사"(1852년 6월 6일)는 그의 애국심을 잘 보여준다.[48]

1816년 찰스 로버트 레슬리(Charles Robert Leslie)가 그린 존 퀸시 애덤스(John Quincy Adams) 초상화. 그는 대륙주의의 초기 지지자였으나, 말년에는 미국의 노예제 확장에 기여한 자신의 역할을 후회하고 텍사스 합병에 대한 주요 반대자가 되었다.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는 구절은 1812년부터 1867년 알래스카 매입까지의 미국의 영토 확장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1812년 전쟁부터 알래스카 매입까지의 이 시대는 "명백한 운명의 시대"라고 불린다.[49] 이 기간 동안 미국은 태평양까지 확장되어—"바다에서 빛나는 바다까지"—오늘날과 같은 미국 본토의 경계를 대부분 정의했다.[50]

1845년, 존 오설리번이 처음 사용한 "명백한 운명"은 당시 미국의 텍사스 공화국 합병을 지지하는 표현이었다. 이후 미국의 팽창을 "문명화"·"천명"으로 간주하여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과 서부 진출을 정당화하는 구호가 되었다. 19세기 말 "프런티어"가 사실상 소멸하자, 미국-스페인 전쟁, 미국-멕시코 전쟁, 필리핀-미국 전쟁, 하와이 합병 등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영토 확장과 패권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말이 되었다.

영국의 제국주의 정치가 조셉 체임벌린도 "매니페스트 데스티니"라는 말을 사용하여, "앵글로색슨 민족은 식민지 경영에 가장 적합한 민족이며, 아프리카에 문명을 가져올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135]

1890년대에 '명백한 운명'이라는 용어는 미국의 해외 확장을 촉진하는 데 다시 사용되었다. 1896년 선거에서 공화당은 백악관을 탈환하여 이후 16년 동안 장악했고, 이 기간 동안 명백한 운명은 해외 확장을 지지하는데 이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명백한 운명의 버전이 1840년대의 대륙 확장주의와 일치하는지 여부는 논쟁의 대상이었다.[113]

1898년,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은 하와이 공화국 병합을 옹호하며 "우리는 캘리포니아만큼, 그리고 훨씬 더 하와이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명백한 운명입니다."라고 말했다. 반면, 민주당 출신의 전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매킨리의 영토 병합을 "우리 국가 운명의 왜곡"이라고 비판했다.[114]

1898년 만화: 샘 아저씨가 쿠바 스테이크, 푸에르토리코 돼지고기, 필리핀 제도, 샌드위치 제도(하와이)가 적힌 메뉴판을 보고 있다


같은 해, 미국은 쿠바 봉기에 개입하여 스페인-미국 전쟁을 일으켜 스페인을 축출했다. 파리 조약에 따라 스페인은 쿠바에 대한 주권을 포기하고 필리핀 제도, 푸에르토리코, 을 미국에 할양했으며, 필리핀 할양 조건에는 미국이 스페인에 2000만달러를 지불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이 조약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115]

전쟁 전, 미국 상원은 텔러 수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켜 쿠바를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로 선포하고 섬의 합병을 막았다. 그러나 플랫 수정안(1902)은 쿠바를 사실상 미국의 보호령으로 만들었다.[116]

,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획득은 미국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전통적으로 미국은 새로운 주가 기존 주들과 동등한 입장을 갖도록 영토를 획득했지만, 이 섬들은 식민지로 획득되었다. 이 과정은 섬 사건을 통해 정당화되었으며, 대법원은 모든 미국 통치 지역에 헌법적 권리가 자동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판결했다.[117]

프레드릭 머크에 따르면, 이러한 식민지 획득은 명백한 운명의 원래 의도와 단절을 의미했다. 이전에는 "명백한 운명에는 주가 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결코 합병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 원칙은 1899년 제국주의에 의해 폐기되었다.[118] 그러나 앨버트 J. 비버리지는 이러한 식민지 확장이 워싱턴, 제퍼슨, 마셜의 견해와 동일하다고 주장했다.[119]

독립을 원하는 필리핀 혁명 정부는 1899년 필리핀-미국 전쟁에서 미국에 저항했지만, 지도자가 체포되면서 붕괴되었다.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은 전쟁과 해외 확장을 비난하며, "'명백한 운명'은 몇 주 전만큼 명백하지 않습니다."라고 썼다.[120]

1917년, 존스 법에 따라 모든 푸에르토리코인은 완전한 미국 시민이 되었다.[121] 1934년, 타이딩스-맥더피 법은 필리핀의 독립을 위한 길을 열었고, 1946년 마닐라 조약에 따라 필리핀은 독립을 획득했다. 1950년 괌 유기법은 괌을 미국의 무편입 무조직 미국령으로 설립하고, 주민들에게 미국 시민권을 부여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명분으로 "세계를 민주주의를 위해 안전하게 만들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명백한 운명'을 전 세계적 차원으로 재정의했다.[127] 그는 1920년 의회 연설에서 "민주주의가 최종 시험대에 올랐다"라며, "미국이 민주주의의 순수성과 영적인 힘을 증명하고 승리하도록 이끄는 것이 명백한 운명"이라고 강조했다.[127] 이는 확장주의를 거부하고 자결권을 지지하며, 미국이 민주주의의 세계적 지도자가 될 사명을 강조한 것이었다.[127]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은 '자유 세계'의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자처했지만, '명백한 운명'이라는 표현은 자주 사용되지 않았다.[127] 대신 '국가 건설'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는데, 국무부 관리 카린 폰 히펠은 미국이 19세기 중반부터 국가 건설과 민주주의 증진에 관여해 왔다고 언급했다.

일부 비평가들은 미국의 중동 등 다른 지역에 대한 개입을 '명백한 운명'의 연장선으로 해석하며, 이를 '미국 제국주의'의 근본 원인으로 비판하기도 한다.[128]

5. 1. 대륙 횡단 철도와 국유지 개척법

대륙횡단철도 건설은 명백한 운명 실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존 가스트(John Gast)의 그림 "미국의 진보(American Progress)"에는 여러 기관차가 서쪽으로 향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철도가 명백한 운명의 상징으로 여겨졌음을 보여준다.[1] 학자 디나 질리오-휘태커(Dina Gilio-Whitaker)는 "대륙횡단철도는 [미국의 대륙 지배]를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가속화시켰다."라고 평가했다.[108] 역사학자 보이드 코스란(Boyd Cothran)은 "현대 교통 발전과 풍부한 자원 개발은 원주민의 토지와 자원 착취를 야기했다."라고 지적한다.[60]

노스다코타주에 거주하는 노르웨이계 미국인 정착민들이 자신들의 농장인 흙집 앞에서


1862년 국유지 개척법(Homestead Act)은 서부 정착을 장려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이 법은 가족들에게 거의 무료로 토지(보통 160acre)를 제공하여, 60만 가구가 서부로 이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123년 동안 2억 건의 청구가 이루어졌고, 270000000acre 이상의 토지가 개척되어 미국 전체 토지의 10%를 차지했다.[86] 정착민들은 5년 동안 그 땅에서 살면서 개간해야 했다.[87] 미국 남북전쟁 이전에 남부 지도자들은 이 법이 더 많은 자유주의적인 주와 자유로운 영토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여 반대했지만,[88] 전쟁 초 남부 상원의원과 하원의원들의 대규모 사퇴 이후 의회는 국유지 개척법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국유지 개척법은 원주민 공동체를 직접적으로 쫓아내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89] 미국 역사가 록산느 던바-오르티즈(Roxanne Dunbar-Ortiz)에 따르면, "5개 문명 부족" 모두 남부 연합과 조약을 체결하고 처음에는 미국을 분열시켜 약화시켜 자신의 땅에 남을 수 있기를 바라며 남부 연합을 지지했다.[90] 윌리엄 테쿰세 셔먼, 필립 셰리던,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와 같은 저명한 남북전쟁 장군들이 이끄는 미국 육군은 이미 조약을 통해 미국에 양도된 토지에 계속 거주하는 "조약을 맺지 않은 인디언들"과 전쟁을 벌였다.[89][90] 국유지 개척자들과 다른 정착민들은 곧 그 뒤를 이어 농장과 광산을 위해 그 땅을 차지했다. 때때로 백인 정착민들은 미국 육군보다 앞서 미국이 아직 개척하지 않은 땅으로 이동하여 여전히 그곳에 거주하는 원주민들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다. 영국계 미국인 역사가 줄리어스 윌름(Julius Wilm)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정착민들이 육군보다 앞서 이동하는 것을 승인하지 않았지만, 인디언 사무국 관리들은 "국경 백인들이 분쟁 지역 근처로 이동하는 것 – 국유지 개척자이든 다른 일에 관심 있는 사람이든 – 은 원주민들의 이주를 필요로 한다"고 믿었다.[89]

역사가 한나 앤더슨(Hannah Anderson)은 국유지 개척법이 환경 훼손을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이 법은 토지의 개척과 농업에 성공했지만, 토지를 보존하는 데는 실패했다. 지속적인 쟁기질로 인해 토양이 침식과 바람에 취약해졌을 뿐만 아니라 토양의 영양분이 고갈되었다. 이러한 삼림 벌채와 침식은 1930년대의 먼지 폭풍(Dust Bowl)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집중적인 벌목으로 많은 숲이 감소했고, 사냥으로 인해 들소를 포함한 많은 토착 동물 개체 수가 감소하여 들소 개체 수는 수백 마리로 줄었다.[86]

5. 2. 원주민 강제 이주와 보호구역 제도

미국의 주민들이 서부로 팽창하면서 아메리카 토착민들과의 갈등은 불가피했다. 질병으로 인구가 감소한 원주민들은 정착민과 군대에 맞서는 것이 불가능했다. 눈물의 길과 같은 사건은 당시 만연했던 원주민 학살의 예시이다.[42]

'명백한 운명'은 원주민 배척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백인의 책무와 같은 유사한 독트린은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아시아를 식민 정복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19세기 미국의 대륙 팽창은 원주민들의 땅 점령과 합병을 의미했고, 이는 인디언 강제 이주를 통해 여러 원주민 부족들과의 충돌과 전쟁으로 이어졌다.[96][97][98][99] 미국은 조약을 통해 원주민의 땅을 매입하려 했고, 원주민들을 "문명화"시켜 미국 사회에 동참시키려 했다. 문명화 프로그램 지지자들은 원주민 부족 정착 과정을 통해 원주민이 필요로 하는 토지량이 줄어들어 백인들이 거주할 토지가 더 많아질 것이라고 믿었다. 토머스 제퍼슨은 원주민들이 백인과 지적으로 동등하지만, 백인처럼 동화되어 살아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밀려날 것이라고 믿었다.[100][101]

제퍼슨은 원주민과의 평화, 동화, 보호를 추구했지만, 원주민이 저항하면 몰살할 것을 주장했다.[104] 그는 원주민을 미시시피 강 너머로 이주시키거나 미국 시민으로 통합시키려 했다.[102] 법학자 로버트 J. 밀러는 제퍼슨이 "발견의 원리"를 이해하고 활용하여 원주민 부족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용했다고 지적했다.[103]

"인디언 강제 이주" 개념은 명백한 운명의 맥락에서 힘을 얻었고, 1830년 앤드루 잭슨이 인디언 강제 이주법에 서명하면서 정책을 통해 더욱 공고해졌다.[105] 잭슨은 원주민 부족에게 미시시피 강 서쪽의 땅을 보장하고, 그곳에서 자치 정부를 누리게 할 것을 제안했다.

미국 서부 지역의 식민화를 지원하기 위해 자원과 산업이 필요했고,[108] 정착민들은 강에 댐을 건설하고, 철도를 설치하고, 채굴을 통해 천연자원과 광물을 찾았다.[108] 이러한 산업화는 주변 가축을 죽이고, 수로를 손상시키고, 원주민들에게 질병을 유발했다.[60]

강제 이주 이후, 미국인들은 원주민의 생활 방식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106] 역사가 프랜시스 파크먼은 인디언들이 "서쪽으로 밀려드는 영국계 미국인의 힘 앞에서 녹아 사라질 운명"이라고 썼다.[107]

인디언 강제 이주 정책은 현재의 보호구역 제도로 이어졌다. 보호구역은 원주민 고향보다 인구 밀도가 훨씬 높아 전염병이 쉽게 퍼졌고,[109] 식생활 변화로 인해 당뇨병, 비타민 결핍, 심장병 등 식이 관련 질병이 증가했다.[109]

5. 3. 제국주의적 확장과 해외 개입

1890년대에 '명백한 운명'이라는 용어는 미국의 해외 확장을 촉진하는 데 다시 사용되었다. 1896년 선거에서 공화당은 백악관을 탈환하여 이후 16년 동안 장악했고, 이 기간 동안 명백한 운명은 해외 확장을 지지하는데 이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명백한 운명의 버전이 1840년대의 대륙 확장주의와 일치하는지 여부는 논쟁의 대상이었다.[113]

1898년,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은 하와이 공화국 병합을 옹호하며 "우리는 캘리포니아만큼, 그리고 훨씬 더 하와이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명백한 운명입니다."라고 말했다. 반면, 민주당 출신의 전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매킨리의 영토 병합을 "우리 국가 운명의 왜곡"이라고 비판했다.[114]

같은 해, 미국은 쿠바 봉기에 개입하여 스페인-미국 전쟁을 일으켜 스페인을 축출했다. 파리 조약에 따라 스페인은 쿠바에 대한 주권을 포기하고 필리핀 제도, 푸에르토리코, 을 미국에 할양했으며, 필리핀 할양 조건에는 미국이 스페인에 2000만달러를 지불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이 조약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115]

전쟁 전, 미국 상원은 텔러 수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켜 쿠바를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로 선포하고 섬의 합병을 막았다. 그러나 플랫 수정안(1902)은 쿠바를 사실상 미국의 보호령으로 만들었다.[116]

,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획득은 미국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전통적으로 미국은 새로운 주가 기존 주들과 동등한 입장을 갖도록 영토를 획득했지만, 이 섬들은 식민지로 획득되었다. 이 과정은 섬 사건을 통해 정당화되었으며, 대법원은 모든 미국 통치 지역에 헌법적 권리가 자동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판결했다.[117]

프레드릭 머크에 따르면, 이러한 식민지 획득은 명백한 운명의 원래 의도와 단절을 의미했다. 이전에는 "명백한 운명에는 주가 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결코 합병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 원칙은 1899년 제국주의에 의해 폐기되었다.[118] 그러나 앨버트 J. 비버리지는 이러한 식민지 확장이 워싱턴, 제퍼슨, 마셜의 견해와 동일하다고 주장했다.[119]

독립을 원하는 필리핀 혁명 정부는 1899년 필리핀-미국 전쟁에서 미국에 저항했지만, 지도자가 체포되면서 붕괴되었다.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은 전쟁과 해외 확장을 비난하며, "'명백한 운명'은 몇 주 전만큼 명백하지 않습니다."라고 썼다.[120]

1917년, 존스 법에 따라 모든 푸에르토리코인은 완전한 미국 시민이 되었다.[121] 1934년, 타이딩스-맥더피 법은 필리핀의 독립을 위한 길을 열었고, 1946년 마닐라 조약에 따라 필리핀은 독립을 획득했다. 1950년 괌 유기법은 괌을 미국의 무편입 무조직 미국령으로 설립하고, 주민들에게 미국 시민권을 부여했다.

5. 4. 20세기 이후의 유산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명분으로 "세계를 민주주의를 위해 안전하게 만들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명백한 운명'을 전 세계적 차원으로 재정의했다.[127] 그는 1920년 의회 연설에서 "민주주의가 최종 시험대에 올랐다"라며, "미국이 민주주의의 순수성과 영적인 힘을 증명하고 승리하도록 이끄는 것이 명백한 운명"이라고 강조했다.[127] 이는 확장주의를 거부하고 자결권을 지지하며, 미국이 민주주의의 세계적 지도자가 될 사명을 강조한 것이었다.[127]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은 '자유 세계'의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자처했지만, '명백한 운명'이라는 표현은 자주 사용되지 않았다.[127] 대신 '국가 건설'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는데, 국무부 관리 카린 폰 히펠은 미국이 19세기 중반부터 국가 건설과 민주주의 증진에 관여해 왔다고 언급했다.

일부 비평가들은 미국의 중동 등 다른 지역에 대한 개입을 '명백한 운명'의 연장선으로 해석하며, 이를 '미국 제국주의'의 근본 원인으로 비판하기도 한다.[128]

6. 비판적 관점

19세기 말 서부 확장은 오리건 영토의 비옥함, 캘리포니아 금광 발견, 광물 자원 개발 등으로 경제적 성장을 가져왔지만, 남북전쟁과 노예 해방 운동의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미국은 멕시코-미국 전쟁을 통해 알타 캘리포니아와 누에보 멕시코를 점령했다.[135]

'명백한 운명'은 아메리카 원주민 배척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백인의 책무와 같은 유사한 독트린은 유럽을 비롯한 세계 전반이 아프리카아시아에 대한 식민 정복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명백한 운명"이라는 표현은 캐나다-미국 관계에 대한 문제가 논의될 때 캐나다 내에서 가끔씩 언급된다.

6. 1. 인종주의와 제국주의 비판

'명백한 운명'은 아메리카 토착민 학살과 서부 진출을 정당화하는 구호로 사용되었으며, 이는 인종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비판을 받는다.[132] 미국의 서부 확장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질병과 전쟁으로 인한 인구 감소를 가져왔고, 눈물의 길과 같은 사건은 조직적인 원주민 학살의 사례로 지적된다.

멕시코와의 대립은 미국의 영토 확장을 가져왔지만, 이는 소수 집단에 대한 다수의 지배를 강요하는 문제점을 드러냈다. '명백한 운명'은 백인을 "미개한 자"들을 대체할 "신이 선택한 자"로 묘사하는 인종주의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1840년대 경제적 어려움으로 오리건 지역에 정착한 개척자들은 원주민들과 영토 분쟁을 겪었다. 원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저항했지만, 미국의 팽창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었다. 텍사스에서는 미국인과 멕시코인, 그리고 원주민들 사이에 영토 분쟁이 발생했다.

19세기 말 서부 확장은 캘리포니아 금광 발견과 같은 경제적 성장을 가져왔지만, 남북전쟁과 노예 해방 운동의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명백한 운명'은 멕시코-미국 전쟁을 통해 알타 캘리포니아와 누에보 멕시코를 점령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명백한 운명'과 유사한 이데올로기인 '백인의 책무'는 유럽 국가들이 아프리카아시아를 식민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들은 인종적 우월성을 바탕으로 다른 민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제국주의적 행태를 정당화했다.[135]

율리시스 S. 그랜트는 멕시코 전쟁을 강대국이 약소국을 상대로 벌인 부당한 전쟁이라고 비판했다.[45] 휘그당원들은 영토 확장에 반대하며 미국의 모범적인 역할을 강조했다.[43] 알렉산더 스테픈스는 폴크 대통령의 팽창주의적 해석을 비판했다.[44] 에이브러햄 링컨은 반이민 토착주의와 명백한 운명의 제국주의를 비판했다.[47]

'명백한 운명'이라는 표현은 캐나다-미국 관계에서도 언급되며, 일부 캐나다인들은 미국이 여전히 캐나다 영토 합병을 통해 '명백한 운명'을 실현하려 한다고 믿는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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